오베라는 남자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오베

오베라는 남자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오베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죽음이란 사실 '그리스도교적인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느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현실적인 죽음을 생각한다 해도 역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더없이 소중한 것이기에, 사람은 아무리 힘겨운 상황일지언정 한 가닥 부여잡을 희망만 있어도 죽음을 생각할 리 없다. 남들 눈에는 명예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까닭으로든 삶에서 죽음과도 절망을 느낀다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절망은 이처럼 일단 발을 내디뎠다 하면 헤어나올 길 없는 죽음의 늪으로 사람들을 밀어넣는다. 

 

오베라는 남자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오베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결코 절망만은 아니다. 가난, 질병, 사고, 천재지변 등 더할 나위 없이 궁핍하고 안전하지 못한 삶에서 오는 극도의 불안감도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뿐인가. 깊은 복수심이나 원한, 트라우마나 외로움 같은 정신적 고통 또한 궁핍한 삶 못지않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스웨덴의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오베라는 남자](하네스 홀름 감독)의 주인공 오베라는 남자(롤프 라스가드) 역시 성장하면서 겪은 트라우마와 홀로 남게 된 외로움에 지쳐 자신과 이웃에게 갖은 심술을 부려대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나선 중년남자다.

 

오베 역을 맡은 배우 롤프 라스가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리고 당연히 배역에 맞는 분장을 위해 그렇게 모습을 꾸민 탓이겠지만, 어린시절 동화로 읽었던 스크루지 영감을 연상케 하는 그 얼굴엔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서 처음 그와 마주치는 사람이라도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몸을 피하게 될 것만 같은 포스를 풍긴다.

 

오베라는 남자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오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언짢아지는 그런 심술쟁이들은 왜 그렇게 심술궂어진 것일까? 타고난 본성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어쩌다 심술을 피운 것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어 점점 더 곁에 다가오지 않게 되자 외로움 때문에 심술궂어진 것일까? 어쩌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적막강산 같은 외로움이 사람을 편협하고 심술궂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물론 다행이지만, 그 순간의 오베로서는 결코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외로움에 지친 오베의  자살기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죽으려 할 때마다 때맞춰 나타나 훼방을 놓는 <귀찮은 이웃들 때문>이다.

 

그런데...<귀찮은 이웃들 때문>이라고 했지만..사실은 귀찮기는커녕 <따뜻한 이웃들 덕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 혼자서만 스스로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했을 뿐, 마음을 열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의 곁에는 마음 따스한 이웃들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오베(필립 버그)다. 이때는 좀 날카로워 보이고 왠지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은 있지만, 중년의 오베에게서 나타나는 심술살은 전혀 없는 모습이다. 그러니 그가 단순히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되나캐나 심술쟁이가 되어 살다가 기어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결코 평탄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오베다. 어릴때  일찍 엄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그는 아버지에게 드디어 자신이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고 독립을 선언하던 날 말 그대로 눈깜짝할 사이에 아버지까지 잃고 만다. 건널목을 지나가던 아버지가 달려오는 기차에 치어 그가 보고 있는 바로 눈앞에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다행히 홀로 남아 외롭게 살고 있던 있던 그에게 행운의 여신은 깜짝선물을 보내준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 소냐(이다 엥볼)를 그 곁으로 보내준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소냐에게 호감을 갖게 된 오베는 그녀에게 어렵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소냐는 아름다운 미소로 그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다. 레스토랑에서 소냐를 만난 그는 두 사람분의 식사비를 낼 돈이 없어 그녀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를 주문해 주고 자신은 스프만 먹는다. 그런데 왜 혼자만 스프를 먹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돈이 없어서 그런다는 말을 듣고도 혈혈단신에 빈털터리 오베에게서 달아나기는커녕 식탁 너머로 기습 키스를 하며 오베를 받아들인 소냐다.  

 

 

기쁨에 겨워 소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것도 잠시, 두 사람은 소냐의 임신축하 겸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버스 전복사고로 뱃속에 든 아이도 잃고 소냐의 두 다리도 잃고 만다. 오베는 아내에게 일어난 사고는 "내 인생 최고의 순간에 일어나 최고의 사고였다"고 회상하며 슬퍼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냐는 그런 불행에도 절망하지 않고 교원자격증을 따내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지만,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오베는 그의 전부이자 사는 이유였던 소냐의 묘지를 매일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오늘은 귀찮은 이웃들의 방해로 못 죽었지만, 내일은 어떻게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성공해서 당신 곁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렇듯 이웃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고, 매사에 버럭버럭 화를 내며 심술을 부리는 오베이지만, 자신에게 친밀감과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니 그 깊은(?) 속을 알 길이 없다.  

 

그는 자살하기 위해 목을 매었다가도 이웃이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실패하자 한때 절친이었으나 자신을 배신(?)한 것으로 알고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난방기도 수리해 주고, 심지어는 총으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가도 다급히 현관문을 두드리는 이웃 때문에 총알이 빗나가자 투덜투덜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기꺼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게다가 스스로 소냐의 제자였다고 자처하는 미덥지 못한 청년들이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집에 들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물론 끔찍이 싫어하던 길고양이 먹이까지 챙기며 키워주는 오베다.

 

그러고 보면 살아오는 내내 끊임없이 불행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정이 뚝뚝 떨어질 만큼 무뚝뚝하고 심술궂을망정 남을 속여 등쳐먹거나, 이중성을 띤 교활한 모습을 보이거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듯 사람을 배신하는 일도 없이 마음속 따뜻함을 잘 간직한 사람이 바로 [오베라는 남자]임을 알 수 있다.

 

 

보통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관대해지고 이해심이 많아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이처럼 노인들이 여유롭고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에릭 폰 히펠 연구팀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인들이 여유롭고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는 변화를 원하지만 인식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나이가 들면 제어능력도 점점 더 떨어질 뿐 아니라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연구팀은 "노인들은 편견에 치우친 생각을 제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며, 보다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노인들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네스 홀름 감독은 이 연구결과를 영화 [오베라는 남자]의 심술궂은 오베와 다정다감하고 배려심 깊은 오지라퍼(?) 이웃들을 통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상, 오베라는 남자 죽음과도 같은 외로움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오베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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