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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 가엾은 슬기를 울게 만드는 원흉들!

 

"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니 엄마는, 그저 엄마가 저기 어디 있다 그러고 살아.
너 버리고 딴 사람하고 결혼한 엄마가 뭐 그리 그리울 게 있어! 그런 엄마는 엄마도 아니야.

채린이 아줌마가 엄마야. 쭉 평생 그러고 살아야 해. 그게 니 팔자야."

 


 

위 대사는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할머니(김용림)라는 사람이

어리디어린 손녀 슬기(김지영)가  새엄마 채린(손여은)과 자꾸 갈등을 일으키자

나무라면서 하는 말이다.

 

너 버리고 딴 사람하고 결혼한 엄마라니?
쭉 평생 그러고 살라니?
그리고 그게 니 팔자라니?

 

이게 며느리 은수(이지아)를 끔찍하리만큼 들볶아서 기어이 남편과 딸을 두고

집을 뛰쳐나가게 만들어  결국 손녀로 하여금 그 엄마를 잃게 한 장본인이 할 수 있는 말일까?

왜냐하면 그 할머니가 바로 손녀만이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 둘의 삶을 불행 속으로 밀어넣고,

그리하여 그들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삶까지도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엄마 채린은 의붓딸 슬기가 친엄마 은수가 녹음해 준 동화책을 몰래 듣고 있었던 것을 알고 

제분에 못 이겨 슬기를 혼내다가 슬기가 울면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못 나가게 잡아끌고 있다,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새엄마 채린이 또 하나의

국민악녀로 등극한 모양이다. 또 하나의 악독한 계모가 탄생한 것이다.

 

'계모'라고 하면 먼저 어린시절 누구나 한 번은 읽었을 동화 <콩쥐팥쥐>의 팥쥐엄마,

<효녀 심청>의 뺑덕어엄(뺑덕어멈은 악처로도 유명하지만), 그리고 <신데렐라>의 계모 등이 떠오른다. 

그 외에도 어릴때 읽었던 동화책에는 양부모를 잃든, 두 부모 중 한 부모를 잃든,

어쨌든 부모를 잃은 순간 시작되는 아이의 불행을 그려낸 내용들이 많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시절 머리에 낙인찍힌 기억으로 인해 우리는 '계모'는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이 깊이 뿌리를 내린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부모가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어쩔 수 없이

새엄마를 맞게 된 경우가 아니라면, 즉 부모의 이혼이나 불륜 등으로 인해 

새엄마의 손에 길러지게 됨으로써 아이가 구박받고 심지어 학대까지 당하는 거라면,

그 1차적 책임은 새엄마가 아니라 부모에게 있는 게 아닐까.

아이들이 하기 좋은 말로 "누가 낳아달라고 했냐, 왜 마음대로 낳아놓고 

이렇게 불행에 빠뜨리느냐"며 따져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부모로서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부모도 아이 생각은 않고 이혼을 하거나 불륜을 저지르고는 서로 아이를 가져가겠다느니

아니면 서로 데려가라며 싸우고, 이도 저도 안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떠맡기거나, 

심지어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는 보육원에까지 보내버리는 경우도 허다한데,

어떻게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새엄마가 잘 길러주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의붓자식을 구박하는 못된 새엄마도 있을 것이고, 

오히려 친부모보다 더 잘 해주는 새엄마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친부모들이 자신들도 못하는 일을

의붓부모에게 떠넘기고는, 그저 길러주겠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해해야 할 당사자들이 

"남의 자식인데 잘할 리 있겠어" 하며 지레 색안경을 쓰고 보는 못난 행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 아이를 남의 손에 떠맡겨놓고도 무관심하기 이를 데 없는 부모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정작 아이를 불행에 빠뜨린 것은 자신들이면서 의붓부모가 자기 아이에게 잘해주는지 못해주는지

도끼눈을 뜨고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친부모 또한 어이가 없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는 너나 나나 하등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슬기를 눈물짓게 만드는 못된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의붓딸 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만들고 있는 이 새엄마 채린은 

어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슬기와 거의 비슷한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만큼 겸허하고 반듯한 부모 밑에서 자란 딸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올바른 인성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에게 할 말 못할 말도 가리지도 못할 만큼 철딱서니도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눈치도 없고,

새로이 편입하게 된 곳에 이미 존재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심도 없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지혜도 전혀 없는 사람이다.

 

즉 그녀가 단지 계모여서 슬기를 구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 또한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만들어낸 또 한 명의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의붓딸 슬기에게 하고 있는 폭력적인 행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 곱고 지혜로워 보이는 얼굴로 어쩌면 그렇게 상대방의 상처나 약점이 되는 부분을

꼭꼭 잘도 짚어내면서 야죽거리는지, 그 악귀 같은 시어머니도 요즘은 제대로 적수를 만난 것 같다.

 

 

 

 

슬기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원흉은 사실 바로 이 슬기 할머니다.
다 장성한 아들과 딸을 여전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움켜쥔 채 지금도 마치 어린애들 다루듯

사사건건 깊숙이 간섭하면서, 바람직한 쪽으로 자식들을 이끌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자식의 삶을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방법인 줄 알고 있는 미련함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일단 결혼을 시켰으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그저 잘 살아주기를 바라고,

자식들이 뭔가 도움을 요청할 때나 정성스럽게 그 도움을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 아닐까?
아들 태원(송창의)이 아내(이지아)와 서로 마음이 맞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것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폭력적인 등쌀에 견디다 못해 이혼을 결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아들의 가정이 깨지는 바람에 아들의 인생은 물론 손녀의 삶까지 완벽하게

망가뜨린 죄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이 할머니는 언제쯤이나 깨닫게 될까? 

 

하긴 언제든 그런 깨달음이 올 것이라고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새엄마 때문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손녀에게

너 버리고 딴 사람하고 결혼한 엄마라느니, 쭉 평생 그러고 살아야 한다느니, 

그게 니 팔자라느니 하는 말들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할머니는 아들뿐 아니라 손녀에게도 죽어서도 씻을 길 없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입으로는 누구보다도 아들과 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지만, 그 사랑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집착이거나 탐욕일 뿐, 결코 진정한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사람, 슬기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나쁜 사람이 있다.

바로 슬기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만큼 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슬기아빠다.

 

이 슬기아빠 또한 겉모습은 저토록 착하고 반듯한 모양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모를 만큼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결혼을 하고 아내를 맞이하고 예쁜 딸까지 낳아서 가정을 꾸렸으면, 그 가정을 화목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지켜주는 것이 남편이자 아빠인 그에게 주어진 지상최대의 과제다 

그런데 아내가 무슨 남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도저히 함께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정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니면 손쓸 길 없는 경제적 궁핍이나 고칠 길 없는 큰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오직 자신의 어머니 등쌀에 못 이겨 집을 뛰쳐나간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그는 나약하다 못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남자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사랑하는 딸 슬기에게 난데없는 불행의 바윗덩이를 덮씌운 장본인이

바로 자신인 줄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어머니를 원망하고,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 그 남자의 아이까지 가진 아내에게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끼고.

심지어는 새아내 채린이 자기 딸을 잘 길러주지 못한다며 화를 내는 모습이 정말 찌질해 보인다.

 
아내도 지키지 못하고 딸도 못 지킨 죄를 그는 어디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부모를 버리라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되었으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엿한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

또 그 과정에서 부모를 속상하게 만들고 화나게 했다 한들, 부모와 자식은 천륜인 걸 어찌하겠는가?

진정한 마음만 있다면 결국 예전대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슬기에게 흐르는 눈물을 참고 우걱우걱 밥을 먹게 만든 또 한 사람은

자타공인, 슬기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문제엄마 은수다. 

슬기아빠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 그 남자의 아이까지 가진 주제에 

행여 자기 딸이 새엄마에게 구박이나 받고 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자기도 견디지 못해 버리고 나온 딸을 누가 잘 돌봐줄 거라고 믿고 있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도 저렇듯 이 모든 상황에서 마치 희생자인양 우아떠는 모습으로

따따부따 지극히 원론적인 말이나 내뱉고 있으니, 그런 엄마를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고 그리워하는 슬기가 그저 가엾을 뿐이다.

 

자식을 버리고 나올 만큼 독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즉 시어머니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든 아니면 전격적으로 대항을 해서든

남편과 딸 곁을 지킬 수 있는 각오를 다질 만한 힘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이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늘 조용히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세 번 결혼하는 여자>라는 제목대로 은수가 세 번 결혼을 할 경우,

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전남편 태원의 집안뿐 아니라 현재의 남편

준구(하석진)의 집안에까지 또 한 번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우아한' 악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슬기아빠 태원과 재결합을 하는 것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현상황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동안 굳이 겪지 않았어도 

좋았을 상처와 고통의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닫고, 

앞으로 그 행복을 놓치는 일 없이 잘 살아가는 것만이 이 불행을 자초한 사람들이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할 인생의 교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