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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박열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의에 대처하는 자세

 

박열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의에 대처하는 자세

 

 

이제훈, 최희서 주연의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을 보기 전에는 조선인 독립운동가 박열(이제훈)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인 일본을 저버린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선택에 대해 좀 의구심이 있었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무리 깊고 뜨거운들 그 시대의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라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하늘을 찔렀을 법한데,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또 남녀를 떠난 보편적인 인간애라고 하기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당시 주변상황이 자기 한 목숨 부지하고 살기에도 버거울 만큼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현실적으로 누군가를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알아본 박열 관련 포스팅(조선인 독립운동가 박열과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선택한 길)에서도 그저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에 대해 큰 매력과 사랑을 느끼고 함께하기로 자처했다는 정도로만 소개가 되었기에 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박열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의에 대처하는 자세

 

다행히 지루하리만큼 천천히 흐르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박열]을 개봉일에 맞춰 보면서 그 의문이 말끔히 풀렸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남녀 사이도, 국가도 초월한 정의 추구에의 신념이 동일한 데서 오는 큰 그림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 시를 통해 박열이 부르짖고자 하는 정의에의 신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박열 <개새끼> 

 

불의에 무릎을 꿇고 권력에 아부하면서 그저 하늘이나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도 그저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나 뿜어대는 것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굴욕감을 <개새끼>라는 시로 토로하는 박열의 권력과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네코 후미코는 그 시에서 생생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가네코 후미코 또한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선으로 왔지만 조선에서도 할머니와 고모에게 모진 학대를 당하면서 일본, 조선 가릴 것 없이 못 살고 못 배운 사람들에 대한 이유없는 핍박과 기득권의 부조리한 갑질에 강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따라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두 사람이 추구하고자 한 것은 남자냐 여자냐 혹은 조선이냐 일본이냐 하는 국적을 따지기 이전에 오직 자유와 평등,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사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를 실현하는 데 남녀 사이라는 것이, 나아가 조국이 다른 것이 어찌 걸림돌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국경을 초월한 깊고 뜨거운 사랑을 한 연인이라기보다 누구나 자유를 만끽하고,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지 않으며, 옳고 그름이 주관적 잣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평등한 삶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진정한 아나키스트였다고 불려야 마땅할 것 같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한 반일영화가 아니라 국적을 초월해 불의에 맞서며 정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신념을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되는 아나키스트는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정부나 국가가 오히려 막강한 권력을 휘드루는 권력자로 국민들 위에 군림한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니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돈이든 배움이든 혹은 힘이든 권력이든, 많이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에게 전혀 베풀 마음이 없다면, 나아가 더 가진 것으로 덜 가진 사람들을 휘두르려 한다면, 많이 가진 것이 뭐 그리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

 

링컨은 "그 사람의 인품을 알아보려면 권력을 줘보라"고 말한 바 있다. 돈이 많은 것은, 배움이 큰 것은, 권력이 막강한 것은 그것을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는 데 이용할 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용할 때 더 밝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얕은 인간의 속성상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갖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휘두르려고만 한다. 여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주인에게 걷어차이고 뒤에 몰래 숨어 달이나 보고 짖는 개새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열이나 가네코 후미코 같은 사람들은 역사의 길목길목에서 등장해 자신이 그저 개새끼가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덕분에 지금과 같은 평형이나마 유지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홈피에 올라 있는 스토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된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내각은 "조선인에게는 영웅, 우리한텐 원수인 적당한 놈"을 찾던 중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한편 일본의 간교한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주겠다'며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한다. 

 

위 사진은 두 사람이 기꺼이 감옥생활을 하던 중 일본인 변호사의 양해하에 찍은 사진이다. 수감된 것을 오히려 기념하는 듯 여유자적한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이 폭탄을 던지거나 살신성인하는 행동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으로 죽어간 6천 명의 사상자를 숨기려는 일본의 간교함을 세계 만방에 폭로하기 위해 대역죄인과 사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단식과 재판 도중에 보이는 무례한 태도, 일본 재판정에 조선 예복 차림으로 서게 해주지 않으면 재판을 받지 않겠다며 대역죄인으로 감옥에 갇힌 몸이면서도 오히려 더 큰소리치는 으름장, 사형선고를 앞두고도 이렇듯 태평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등 끊임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이슈를 만듦으로써 우왕좌왕하고만 있는 조선을 위해 자칫 덮여버릴 수도 있는 관동대지진 대학살 사건을 만천하게 폭로하는 큰일을 해낸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20여 년 전 영화 [아나키스트]를 제작하던 중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룬 다양한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독립투사 가운데 <박열>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고등학생이었음에도 일제의 폭압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도쿄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청년 박열에게 운명처럼 매료됐다는 것이다.

 

서양의 사상과 이념이 난립하던 1920년대, 유럽의 혁명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아나키즘에 사로잡힌 박열의 삶에 주목한 이준익 감독은 참혹한 역사를 묻으려는 일본 내각을 추궁하고 적극적으로 항거했던 박열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화로나마 박열의 삶과 가치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20년을 공들인 끝에 드디어 영화 [박열]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훈의 열연 못지않게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최희서의 열정적인 연기가 좋았고, 이제훈과 대립각을 세우는 일본의 내무대신 미즈노 역을 맡은 김인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이상, 박열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불의에 대처하는 자세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