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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대립군 대립왕 광해(여진구)와 대립군(이정재)의 동병상련

 

대립군 대립왕 광해(여진구)와 대립군(이정재)의 동병상련

 

 

이정재, 여진구 주연의 [대립군](代立軍)은 '대립'(代立)이라는 낯선 낱말의 의미를 영화를 보면서 깨달아가게 해주는 시대극이다. '대립'(代立)이란 '대신 세운다'는 뜻이고, '대립군'(代立軍)이란 대신 군역을 서는 병사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두고 도망간 아버지 선조 대신 세자로 책봉돼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광해, 그리고 생계를 위해 군역을 대신 치르던 병사를 가리킨다. 대신 군역을 치른<대립군(代立軍)>이나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겁한 찌질이 아버지 선조 대신 왕위에 앉게 된 대립왕 광해, 즉 <대립군(代立君)>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왜군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 함께 시련을 겪으면서 누군가를 대신한다는 억울함의 굴레를 벗고 홀로서기를 한다. 대립군(代立軍)과 대립군(代立君)의 동병상련인 셈이다.  

 

최근 그 평가가 많이 달라진 광해가 대립왕이 된 데에는 가슴아린 사연이 있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광해가 백성을 위하는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그리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광해는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서 태어난 차남이었다. 선조에게는 정실부인이 둘이나 있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는데, 후궁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많아서 맨 마지막으로 인목대비에게서 태어난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까지 합하면 모두 14명이었다. 

 

대립군 대립왕 광해(여진구)와 대립군(이정재)의 동병상련

 

선조는 세자 책봉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는데, 자신도 서자 출신이었기에 후궁의 자식을 왕위에 앉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후궁의 자식이 왕위에 오를 거라면 공빈 김씨의 자식이 아닌 인빈 김씨의 자식인 신성군을 다음 왕으로 마음에 꼽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남도 아니고 차남인 광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민함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덕분이었다.

 

1592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서울 경복궁에서 압록강변 의주로 피신을 했는데, 여차하면 당시 동맹국인 중국 명나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간 왕에게 화가 난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는 등 큰 난동을 피우자 선조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전쟁 도중에 부랴부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나는 여기서 기회를 엿볼 테니 너는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하라"고 지시한다. 그토록 미뤄오던 세자 책봉을 불시에 감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차츰 알아가면서도 광해는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세자 신분으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오가며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전라도와 경상도 등 전국을 다니며 전쟁을 진두지휘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큰  업적을 남긴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왜군 앞에서 조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선조가 의주까지 내몰리면서 조정이라는 존재는 백성에게 점점 더 희미한 존재가 되어가던 그때 분조를 이끌고 각 곳을 누비고 다니는 광해를 보면서 백성들은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운을 얻는다. 이렇듯 분조를 이끌었던 시기에 광해는 백성들에게 있어 사실상 ‘조선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왕위에 올라 목숨을 걸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했던 광해의 마음은 얼마나 무섭고 억울하고 공허했을까. 왕이 되고 싶지도 않았는데 왕위에 앉히고, 아버지 대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전쟁 속으로 휩쓸려들어간 광해는 비록 왕의 신분이긴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생계를 잇고자 남의 군역을 대신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선 대립군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대립군은 함께 그 험난한 고비를 겪으면서 남의 군역을 사는 대립군이 아니라 나라와 왕을 위해 스스로 싸우는 진정한 군인으로,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하는 대립왕이 아니라 진정으로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왕으로 거듭난다.

 

 

본인의 목숨보다 동료들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대립군의 수장 토우 역을 맡은 이정재다. 천민으로 태어나 못 배우고 없이 살지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지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어서 찌질이 왕 선조보다도 오히려 더 짧은 기간에 광해를 백성들의 왕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정재는 영화를 한 편씩 찍을 때마다 점점 더 변모해 가는 연기력을 보여주어서 다음 영화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은근히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에 비해 여진구는 이번 영화에서 고뇌에 찬 광해의 모습을 거의 무표정으로 보여줄 뿐, 자신 앞에 닥친 어마어마한 고난에 대한 감정을 표출해 내지 못해 밋밋한 캐릭터로 일관해서 아쉬웠다. 대립군 중의 한 사람인 곡수 역을 맡은 김무열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오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듯하다. 영화를 보면서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골룸을 닮은 오랑캐였는데,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사진 한가운데에 골룸을 닮은 사람이 바로 그 인물이다. [검사외전], [대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등에도 출연한 연극배우 박지환이 맡은 골루타 역인데, 그 영화들에서는 그닥 존재감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만큼은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정윤철 감독은 [대립군]의 험난한 여정 속에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골룸과 같은 캐릭터를 배치하고 싶어서 골루타 역으로 특별히 비주얼이나 캐릭터의 성격에 잘 부합된 배우를 찾았는데, 드디어 찾아낸 박지환은 영화 속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변발까지 감행할 정도로 캐릭터에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덕분에 오직 살기 위해 여진족으로, 조선인으로, 다시 대립군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골루타의 고달픈 인생역정을 코믹하면서도 처절한 모습으로 보여준 최고의 신스틸러가 되었다. 

 

 

강계전투를 마치고 왜군을 피해 다시 배를 타고 떠나는 대립왕과 대립군, 그리고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여기서 대립군의 수장 이정재는 다른 사람들이 배를 타고 떠날 수 있도록 끝까지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숨을 거둔다. 하지만 이제는 남을 대신해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왕과 동료,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나가 싸운 것이기에 왜군의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억울함보다는 자부심을 보여준다. 대립군(代立軍)이든 대립군(代立君)이든 남을 대신해서 사는 대리인생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죽음도 기꺼이, 그리고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다.

 

 

남의 목숨을 대신할 목숨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인데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사지로 내몰렸던 광해, 그리고 양반들을 대신해 전쟁터로 내몰린 채 "나라가 망해도 우리 팔자는 안 바뀌어!", "우리한테 해준 게 뭐라고 목숨을 바친단 말이오!"라고 서글프게 부르짖었던 대립군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그 소중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가야만 했던 그들을 스크린으로나마 잠시 불러내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넨 것 같은 [대립군]이었다.

 

이상, 대립군 대립왕 광해(여진구)와 대립군(이정재)의 동병상련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