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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4가지 노하우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4가지 노하우

 

 

삼국의 주인들과 정치가들은 나름대로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당한 방법으로 민심을 복종시켰고 또 어떤 사람은 부정한 수단을 써서 민심을 농락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남들이  최선을 다해 일하도록 모략을 쓰는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나아가 쓸모있는 인재를 구했습니다. 

 

중국대륙학자 곽우가는 [성공하는 리더를 위한 삼국지]에서 삼국지의 영웅들의 카리스마 리더십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중 유비, 제갈공명, 조조, 손권이 행한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4가지 노하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인재를 친형제처럼 아낀 유비, 먼저 모범을 보였던 제갈공명, 인간의 희로애락까지 적절히 활용한 조조, 뛰어난 배려심으로 내부를 단결시킨 손권의 사례를 통해 경쟁자나 적까지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비결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4가지 노하우 유비

 

 1  사람들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히 여겨라 - 유비

 

조조가 번성을 공격하려 하자 유비는 조조에게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반성을 버리고 양양으로 가려고 하면서 유비는 백성들에게 같이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같이 떠나고 남고자 하는 사람은 남으라고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일제히 "비록 죽더라도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울며 소리쳤다.

 

백성들은 노인들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들을 이끌며 떼를 지어 강을 건넜는데, 곡성이 그치지 않았다. 배 위에서 이 모습을 본 유비는 "나 한 사람 때문에 백성들이 이처럼 큰 고난을 겪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하랴" 하며 강물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모두 통곡했다.

 

 청나라 초의 저명한 비평가 모종강은 유비가 강에 몸을 던지려 한 것은 민심을 사기 위한 위선이었다고 평했다. 사실 전쟁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유비는 감정이 그다지 풍부하지도 않고 의지가 박약하지도 않았다. 그런 유비가 고난을 겪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강에 몸을 던지려 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결집시키기 위한 연극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삼국의 영웅들 중 유비는 애민정신이 가장 강했다. 더욱이 평소 "큰일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유비였기에 백성들을 아꼈다. 따라서 비록 유비의 애민정신에 위선적인 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기본적으로 백성들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은 살인과 살상이 난무했던 전쟁시대에 매우 큰 가치가 있었다고 하겠다.

 

제갈공명

 

 2  리더가 먼저 규정을 철저하게 지켜라 - 제갈공명

 

건흥 9년 봄, 제갈공명은 다시 위나라를 정벌하러 나갔다. 하지만 위나라 장수 사마의는 공명에게 이미 여러 차례 패한 적이 있어서 성을 굳게 지키며 싸우려 하지 않았다. 공명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노성에 주둔시켰는데, 어느 날 양의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일전에 승상께서는 군사를 백일 기한으로 번을 들게 하셨는데, 이제 기한이 다 됐습니다. 여기 8만 군사 중 4만이 돌아갈 군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명은 자신이 그렇게 명령했으니 속히 그대로 행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군사들이 공명의 지시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손례가 옹주와 양중의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검각을 기습하러 갔다는 보고와 함께 사마의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노성을 공격하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촉나라 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양의는 공명에게 사태가 급박하니 군사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적을 물리친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명은 "내가 군사를 쓰고 장수에게 명령을 할 때는 신의를 근본으로 삼았소. 그러니 당장 큰 환나을 겪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을 붙잡아두지는 않겠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은 나가 싸우겠다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용맹하게 적을 물리쳐 크게 승리했다.

 

 이미 명령을 내렸으니 반드시 군사를 교대해야 한다는 것은 용병술의 기본이다. 하지만 촉나라 군사들이 그 많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갈공명이 '신의를 근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의를 근본으로 한다. 내가 먼저 신의를 지켜야 다른 사람도 지킨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한 나라의 군주와 군대의 장수도 마찬가지다.

 

만일 군주가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도 군주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또한 군대의 장수가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군사들을 지휘할 수가 없다. 제갈공명은 신의를 근본으로 삼았기에 자신의 뜻대로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

 

 3  인재에게 맞는 직책과 보수를 주어라 - 조조

 

봉건사회에서 누구나 바라는 것은 명예와 돈이었다. 조조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잘 활용했기에 그에게 모여들었다. 물론 이 방법이 조조만의 독창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일찍이 한나라 고조 유방도 진평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최대한 만족시켜 주었고 한신이 제왕이 되고 싶어하자 그에게 제왕의 인장을 새겨주었다. 반면에 유방의 적수인 항우는 이 방법을 깨우치지 못한데다 인색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힘을 다하지 않았다.

 

조조는 인재를 모으는 데 자신만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인재를 모을 수 있었고, 그 아래 모인 인재들은 그를 잘 받들었다. 그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는 벼슬을 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금을 내리는 것이었다.

 

 학식이 있어서 역사적인 경험과 교훈을 잘 알고 있었던 조조는 그것들을 잘 받아들였고,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주위사람들에게 적용했다. 예를 들어 조조는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관우가 세 가지 약속 끝에 투항하자 매우 관대하게 대했다. 미녀 열 명을 늘 관우 곁에 있게 했고 사흘마다 작은 연회를, 닷새마다 큰 연회를 열었다. 또한 관우가 말에 오를 때는 금을 주었고 내릴 때는 은을 주었으며, 관우가 안량의 목을 베어오자 그를 한수정후로 봉했다.

 

물론 도원의 결의로 맺어진 의리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관우는 그런 조조를 버리고 유비에게로 가지만, 조조의 방법이 관우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때의 은혜를 생각해서 관우는 훗날 화용도에서 조조가 죽을 뻔했을 때 군령을 어기고 조조를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손권

 

 4  권위로 대하지 말고 진심으로 대하라 - 손권

 

유수전투에서 손권은 조조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해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주태는 이것을 알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들어 포위망에 있던 손권을 찾아냈다. 주태는 앞에서, 손권은 뒤에서 있는 힘껏 싸워 포위망을 뚫었다. 그런데 손권이 또 보이지 않았다. 주태는 다시 고군분투하여 손권을 찾아냈다.

 

주태는 그 와중에 몸에 큰 화살을 맞았고, 손권을 보호하느라 몇 차례나 칼을 맞았다. 만일 주태가 손권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손권은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손권은 주태의 공에 감사하는 의미로 연회를 베풀고 친히 주태의 등을 어루만지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두 번이나 나를 구해주었으니 이제 모든 병권을 경에게 맡기고 모든 고락을 경과 함께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군사를 다루는 핵심을 잘 알고 있었던 손권은 부하 장수들에게 항상 세심하게 관심을 보였으며 마치 친형제처럼 대했다. 여몽이 병이 나자 친히 병문안을 갔고 주연이 병들자 의원과 약을 보내게 했다. 이에 감복한 장수들은 손권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다했고, 손권은 그가 다스리던 동안 동오(東吳)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졌다.

 

장수와 군사들을 잘 배려하는 것은 용병술의 기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기본을 잘 알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장비는 장수들과 부하들을 잘 대해주지 않았다. 그는 술에 취하면 항상 부하 장수들을 때려 후환을 받았지만, 손권은 부하들을 결코 경솔하게 대하지 않고 세심하게 배려했기 때문에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상,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4가지 노하우였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