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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가슴이 설레던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지만, 어린이날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왠지 어린이날 노래의 가사에서와 같이 푸른 하늘을 나는 새 혹은 푸른 벌판을 달리는 냇물처럼 마음이 들뜨는 기분입니다. 이 어린이날 노래를 석동(石童) 윤석중님이 지으셨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테지만, 어린이날을 맞아 [EBS 지식채널e]를 바탕으로 윤석중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평소에는 듣지 않게 되는 어린이날 노래를 모처럼 들으면서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

 

서울 교동보통학교에 다니던 윤석중은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는 방정환님에게 "방정환 선생님! 저는 다섯 가지나 되는 잡지를 읽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잡지는 ‘어린이’입니다. 그런데 의견을 보내도 안 실려서 퍽 섭섭합니다. 이제는 소년 소설, 동요를 써보내렵니다. 그것도 뽑으시는지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배운 뜻도 모르고 발음도 어려운 일본 노래를 듣고는 "우리 말이 버젓이 있는데 이게 뭐람!" 하고 속상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열세 살에 동시 ‘봄’을 지었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가 가엾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1932년 스물 한 살이 된 윤석중은 윤극영, 홍난파의 곡에 노랫말을 쓴 첫 동요집을 출간한다. 퐁당퐁당, 우리집 콩나물죽, 낮에 나온 반달, 우산 셋이 나란히, 오뚝이, 도리도리 짝짜꿍, 밤 한 톨이 떽떼굴... 아름다운 우리말들은 윤석중 덕분에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1933년에는 소파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1938년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어 사용 금지!”가 시행되었고, 사람들은 이름도 빼앗기고, 우리 말, 우리 노래도 빼앗겼다. 이렇듯 발표할 데도 없고 불러줄 사람도 없었지만, 열차에서 우연히 오막살이에서 단잠을 자는 어린아이를 보고 “식민지 현실에서도 옥수수 자라듯 쑥쑥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희망찬 노랫말에 담고 싶었던" 그는 '기찻길 옆' 등 계속 동요를 만들었고, 1945년 새 나라를 찾은 후에는 더 많은 노래를 어린이들에게 선물했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30여 곳의 학교를 다니며 교가를 짓고 1,300편의 동시와 800편의 동요를 지으며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노래를 선물한 아동문학가 윤석중은 "제 노래가 한 편이라도 오래 간다면 좋은 곡의 힘이요, 듣기 좋게 잘 불러준 어린이 여러분 덕택"이라고 말한다.

 

 

1950년 5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든 살 먹은 아이’ 입장에서 어른들에게 당부하실 마음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어린이는 동심으로 돌아가고 어른들은 양심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라고 답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동심도 잃고 양심도 저버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뼈아픈 충고가 아닐 수 없다.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 공모에서 1등 당선 부상으로 자개 책상을 받은 열 다섯 살 소년 윤석중은 가장 사랑하는 잡지에 ‘천재의 어린 예술가’로 소개되었다. 

 

어린이날 노래 
 

 

 

1절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2절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이상,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