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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재심 강하늘과 정우가 보여준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재심 강하늘과 정우가 보여준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재심 강하늘과 정우가 보여준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얼마 전 수년째 기술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오고 있던 공시생이 도서관에서 3만원 가량의 공무원 시험 대비용 문제집을 몰래 들고 나왔다고 한다. 시험준비를 위해 꼭 필요한 문제집인데, 3만원이 없어서 책을 못 사고 훔친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중소기업에 다녔지만 회사생활이 여의치 않아 퇴사하고 주말 오전에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는 3만원도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훔치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피해자가 도서관 앞에 '잃어어버린 책을 찾아달라'는 벽보를 붙인 것을 보고는 책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책주인 이름의 영문약자가 크게 적힌 책이 잘 보이도록 펼쳐놓고는 도서관에서 책주인이 오길 기다렸다. 과연 책주인이 나타나서 책을 돌려줄 수 있었지만, 이미 경찰에 신고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그는 스스로 112에 전화해 자수를 했다.

 

그런데 책주인은 책을 찾았으니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경찰에 말했고, 공시생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경찰관은 책도 사고 밥도 사먹으라며 그에게 5만원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초범인데다 책주인이 처벌을 원치 않으니 즉결심판 청구를 했다고 한다. 20만원 이하 벌금이나 선고유예 판결이 가능한 즉심을 받으면 그가 전과자라는 굴레를 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마음이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진 요즘, 모처럼 듣는 훈훈한 이야기다. 특히 전과자가 될 뻔한 공시생에게 선처를 베푼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관이어서 더 감사하게 느껴진다. 드라마나 영화 탓인지, 아니면 현실세계가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끔찍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라는 말이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게 된 지 오래다. 그보다는 오히려 김태윤 감독, 강하늘, 정우 주연의 영화 [재심]에서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은 현우(강하늘)라는 소년에게 거짓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무차별 폭행을 가하던 그 악랄하기 짝이 없는 경찰관들이 진짜 경찰관들의 모습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말만 경찰이지, 조폭보다도 더 비열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조폭은 불법이라는 조심스러움이라도 있지, 경찰은 합법으로 그럴싸하게 무장까지 하고 있기에 그 잔인함이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물론 어느 분야에서나 그렇듯, 일부 경찰관이 그럴 뿐, 나머지 대부분의 경찰관들은 불철주야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데 온힘을 다 기울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재심]에서는 악랄한 경찰관보다 더 악랄한 싸이코패스 같은 검사가 등장한다. 싸이코패스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지킬 박사처럼 너무나도 스마트하고 친절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은 미친 하이드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사악함으로 가득찬 이중적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살인죄 누명을 쓴 소년의 억울함은 나 몰라라 하고, 뒤늦게 나타난 진범에게는 오히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백하게 만들어 풀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해내는 검사의 멀끔한 얼굴이 괴물처럼 보인다.

 

이 못지않게 더티한 인간들은 역시 그럴싸한 모습으로 오로지 돈을 벌고자 그 옆을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로펌 사람들이다.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이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기본적 인권? 사회정의? 참으로 공허하게만 들린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변호사란 많이 가진 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차라리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재심]의 실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에게 더더욱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가차없이 내치는 이 무정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소중한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사람들에게 그는 시쳇말로 희망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이 더 이상 감동을 주지 않는 요즘이지만, 박준영 변호사 같은 분이 있기에 감히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우의 재심을 맡아 무죄판결을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전문 변호사, 파산 변호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 사건 말고도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사건 등 용의자들의 무죄를 이끌어낸 사건들을 여러 차례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처음 현우의 사건을 소개해 준 사람은 SBS 이대욱 기자였는데, 이대욱 기자는 세상 사람들이라도 현우의 억울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 영화화해 줄 것을 의뢰했다고 한다.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선한 연대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박준영 변호사는 이런 사건을 주로 맡다 보니 수익이 거의 없어서 파산상태에까지 이르렀지만, 고맙게도 지난해 1만 8천 명의 시민들이 후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변호사 역을 맡은 정우의 허당기가 느껴지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단단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준 연기도 좋았고, 바른생활 이미지가 지나치리만큼 강한 강하늘의 변신도 아주 괜찮았다. 껄렁껄렁한 건달기에 욕도 입에 착착 감기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분노가 담긴, 하얗게 번뜩이는 눈빛은 놀랍기까지 할 정도였다. 워낙에 착한 생김새여서 자칫 연기의 폭이 좁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강하늘의 엄마 역을 맡은 김해숙도 언제나처럼 더 말할 나위 없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경찰관 백철기로 나오는 한재영도 참으로 실감나는 악질형사 연기를 선보였다. 때리기만 해봤지 맞아본 적은 없었던 그였기에 나중에 강하늘에게 맞으면서 잘못했다, 미안하다..하면서 아픔을 호소하는 모습이 코미디 같으면서도 씁쓸했다. 로펌 테미스의 대표 이경영도 늘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노회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듯하다.

 

 

누설의 염려가 있으니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것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소개해 보면, 2000년 8월 10일 새벽 2시경 전북 익산 약촌 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12차례나 칼에 찔린 채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동네 다방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년이 한 남자가 뛰어가는 것을 봤다고 말하는 진술을 확보하고, 그로부터 3일 후 목격자 진술을 했던 소년은 용의자가 되어 수사를 받게 된다. 경찰은 수사 결과를 ‘소년은 택시기사와 말싸움을 하게 돼 그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한 후 목격자인 것처럼 보이려고 다시 돌아와 경찰에 진술했다’고 밝힌다.

 

이 사건은 그 후 2013년, 201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으로 조명되어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지만, 경찰, 검찰, 법원은 방송이 나간 후에도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미안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 아니,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 죄를 모조리 뒤집어쓰게 된다는 생각에 절대로 사과를 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을 향해 엔딩에서 법정에 선 정우는 "저는 15년 전, 대한민국 사법부가 한 소년에게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사과할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여기에 서 있습니다. 이 재판의 결과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데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청하는 그 뼈아픈 말도 그들은 여느때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까? 현우라는 분은 지금 결혼해서 두 아이의 아빠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상, 재심 강하늘과 정우가 보여준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