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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 과유불급의 지혜를 가진 태희 씨가 있어 든든합니다!

 

TV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태희(김정난)는  딸 슬기(김지영)에게 동화책을 읽은

녹음기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만나자고 한 첫 올케 은수(이지아)에게

어떻게 그 어려운 시댁에서 많은 시간을 녹음하는 데 쓸 수 있었느냐고 하면서

“그쪽 시어머니는 우리 엄마 같지는 않나 보구나. 노인네 진 빼면서 버티지

왜 이렇게 성급했냐”며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시누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포스팅은 탤런트 김정난 씨와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나오는 정태희라는 인물에 대해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써본 것입니다. 드라마를 안 보신 분도 사람 이야기로구나 생각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0년 전쯤엔 사무실이 마포대교 옆에 있었다. 여의도에서 넘어오면 마포대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그리고 마포역에서는 4번 출구로 나와 왼편으로 약간 오르막진 길을 올라간 곳에

사무실이 있어서 창밖으로 마포대교가 걸린 한강이 바라다보였다.

 

늘 그렇게 한강을 가까이에서 보며 지내다 보니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또 바람이 불거나 안개 자욱한 모습 등 날씨의 변화를

곧바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풀이며 나무에 새순이 돋았나 싶으면 어느새

활짝 곱고 아름다운 꽃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녹음이 짙어지는가 싶으면

또 어느덧 낙엽이 져서 거리를 뒹구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이리 쓸려가고 저리 쓸려가다가

이윽고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들이 꿋꿋한 모습으로 강추위를 견뎌내는 사계절의 변화도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직접 체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선 LG쌍둥이빌딩이 보이고, 저 멀리 보이는 63빌딩 쪽에서는

불꽃놀이라도 있는 날이면 하늘을 향해 쌓아올리는 환상적인 불꽃과 폭죽 소리가 들렸다.

또 봄이면 윤중로 벚꽃놀이, 그 외 갖가지 행사, 게다가 이따금 시위를 겸한 시가행진이라도

벌어진 날이면 차량이 통제된 마포대교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득 메우곤 했다. 

 

 

 

 

마포역  양편으로는 메뉴가 다양한 식당들이 많아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은 아니어도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여의도 넥타이 물결만큼은 아니어도 어디선가 끝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나와 12시를

기점으로 10분쯤 빨리 나서든가 아니면 아예 2,30분 늦게 나가야 좀 수월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특히 불교방송국, 그랜드호텔 뒤편으로

그닥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깔지고 푸짐한 식당들이 많아서 늘 사람들로 붐볐고,

저녁때도 안주 좋은 막걸리며 동동주, 소주 한잔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따뜻한 정담을 나누었다.

여의도가 복잡해서였는지 아니면 구수하고 토속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좋아서였는지, 

여의도 쪽에서도 직장인이며 방송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탤런트며 개그맨들이

곧잘 마포대교를 넘어오기도 했다. 

 

탤런트 김정난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드라마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느 단막극에서인가 김정난 씨가 노처녀 역을 맡아 출연했고,

그 단막극을 거의 혼자 이끌어나갔던 것 같은데, 무리없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연기도 좋았지만 ,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또렷한 모습이 여성스럽게 깜찍하게 예쁘다기보다는 기분좋게

잘생겨 보여서 참 괜찮다 싶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그 단막극을 본 직후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 주인이 약간은 들뜬 얼굴로

“탤런트 김정난이 다녀갔다”며 벽에 써놓은 사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손각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우와! 예뻐! 진짜 미인이야! 잘생겼어! 실물이 훨씬 짱이야! 성격도 좋아. 앗쌀해!”

하며 마치 자기 누이라도 되듯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때는 김정난 씨가 지금만큼은 알려져 있지 않을 때여서 다른 사람들 중에는 

"김정난이가 대체 누구지?" 하고 금방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마침 바로 얼마 전에 그녀가 나온 단막극을 보고 난 터여서 잘생겼다는

식당 아저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후 연기며 미모로 절대 꿀릴 게 없는데 이상하게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성급하지 않게 당당하고 자신감에 참 모습으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온

그녀는 요즘 멋진 여성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주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각시탈>에서 이화경 역을 맡았을 때는 멋드러진 백작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는 의리감 넘치고 똑부러진 국회의원 역을, 그리고 <신사의 품격>에서는

청담마녀 박민숙 역을 맡아 전혀 예기치 않은 재벌녀의 모습을 멋지게 펼쳐 보여주어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구나" 싶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단,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는 말은 보통 큰 기대를 했다가 실망했을 때 쓰는 말이지만,

김정난 씨에 한해서  이 말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데 대한 감탄사로 보면 된다. 

 

그래서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김정난 씨를 보게 되었을 때도 몹시 반가웠다.

그 동안 그가 해왔던 대로라면 이번엔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하는 기대가 컸고, 

시간이 없어 본방을 사수하지 못할 때는 뒤따라가면서라도 꼭꼭 챙겨본 것은 그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나 드라마로나 보게 되는 김정난 씨이지만, 그녀를 볼 때면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단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지혜를

그녀가 완전히 터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도

정태희로 분한 그녀는 이 드라마의 한가운데에서 구도적인 면에서나 심적인 면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을 쥐락펴락하며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멋진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은 추위를 피하려고 서로 엉겨붙었다가도 각자의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추위를 견디기 힘드니  가시에 찔릴 줄 알면서도 

다시 모여들고 또 떨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마침내 가장 고통을 덜 주면서도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최상의 거리를 찾게 된다.

 

사람들 간에도 이런 최상의 거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분별력을 갖춘

'과유불급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김정난, 즉 정태희가 딱 그런 사람이다 싶다.

명품 좋아하고, 엄마의 속물근성을 흉보면서도 그 돈은 돈대로 받아 마음껏 쓰고 즐기는 된장녀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또 서로 불가피하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하기 어려운 껄끄러운 말과 행동도

의연히 총대를 메고 나서서 마다않는 그녀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 정도의 입장에 있다면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는데도 결코 그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깔끔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겉으론 드러나보이지 않는 그 내면에서는 속물근성에다 심술궂은 엄마(김용림)는 엄마대로,

강한 엄마 밑에서 자라 늘 줏대없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밀리는 동생 태원(송창의)은 동생대로,

못된 시어머니 등쌀에 못 견뎌 끔찍이 사랑하는 딸마저 버리고 떠난 올케(이지아)는 또 올케대로 

잘못된 부분은 딱딱 짚어내면서도 어떤 사람에게나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랑이 느껴지는 진한 인간미가 흐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렇기에 동생과 재혼한 후 천방지축의 태도를 보여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새 올케(손여은)도 

거칠게 나무라면서도 뒤로는 두름성있게 감싸고, 느닷없이 엄마를 잃고 마음 둘 데가 없어 방황하는

조카 슬기(김지영)에게도 엄마 못지않은 전폭적인 애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일 터이며, 

여느 부잣집 딸이라면 눈 아래로 깔고 보기 십상인 도우미 아주머니에게까지

따뜻한 배려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멋지게 해내는 것은

바로 김정난이라는 탤런트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역할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딸로서의 정태희

 

 

 

속물근성으로 똘똘 뭉친데다 성깔까지 예사롭지 않아서 누가 봐도 비호감인 엄마이지만,

그리고 그걸 모르는 바 아닌 딸이지만 태희는 한편으로는 엄마가 정신을 바싹 차리도록 

송곳 같은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부글부글 끓는 못된 성질을 삭이느라 끙끙 앓는 

엄마를 따뜻하게 다독인다. 아마 이 엄마는 태희라는 딸이 없었으면 진작에 홧병으로 세상을 떴거나

심장마비에라도 걸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누나로서의 정태희

 

 

거칠고 난폭하기까지 한 엄마 밑에서 늘 자기주장을 한 번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살아온

우유부단한 동생을 가엾어하며, 엄마와 동생 사이, 전처와 동생 사이, 재혼한 채린과 동생 사이를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잘 조절해 나가고 있다. 아미 이 동생도 태희라는 누나의 존재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았다면 엄마와 진작에 의절을 했거나 아니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누로서의 정태희

 

 

 

우리 속담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도 있지만, 동생과 조카를 버리고 떠난

첫 올케가 미울 텐데도 주구장창 못살게 들볶아대는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을

충분히 아는 태희는 못된 시누 노릇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알게 모르게 올케를 돕는 

흑기사를 자처하고 나서는 믿음직한 인간미를 보여준다.

  

 


 

동생과 재혼한 올케가 이중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시어머니, 사랑 없이 결혼한 남편, 

나름대로 애를 쓴다고 하긴 하지만 아직 서먹서먹하고 겉돌기만 하는 의붓딸 슬기,

그리고 새 안주인으로 여겨주지 않는 도우미 아주머니 임실 댁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천방지축에 

철딱서니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앞으로는 어르고 뒤로는 뺨을 치는 지혜를 발휘하면서

기본적으로는 동생 부부가 잘살기를 바라는 그릇이 큰 면모를 보여준다.

 

 

고모로서의 정태희

 


 

엄마가 재혼을 해서 떠난 후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을 잡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조카 슬기에게 

그 누구보다도 큰 바위처럼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는 태희는 고모이지만 

여느 엄마 못지않은 진정어린 애정을 아낌없이 조카에게 쏟아붓는다.

 

 

주인집 딸로서의 정태희

 


 

심술이 철철 넘쳐흐르고 못된 성깔에 수시로 내뱉는 주인 아줌씨의 독설에 늘 전전긍긍하는 

도우미 아주머니 임실댁(허진)에게도 태희는 할 말 못할 말, 할 일 못할 일 가려가면서 하라고 딱딱거리면서도

태희는 임실댁이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눈물로 호소할 수 있는 따뜻하고 곰살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드라마상의 정태희라는 존재처럼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과유불급의 지혜를 발휘하여 인간관계를 해나간다면 아마 훨씬 더 따뜻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